윤창배 형제 / 춘천한마음교회
경찰의 미행을 피해 첩보영화 같이 긴박한 삶을 살다가 긴급체포 되었던 나름 열혈 학생운동가. 사회변혁을 꿈꾸던 혁명의 투사가 집행유예 판결을 받고 구속에서 풀려나 여지없이 굴복했던 이야깁니다.
▲ 윤창배 형제 ⓒ한마음교회
저는 군복무를 포함해서 6년이면 졸업할 인천교육대학교를 8년 6개월 만에 아주 간신히 졸업했습니다. 대학을 오래 다니게 된 이유는 학생운동으로 인한 학점 미 이수, 휴학, 구속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 저는 학생운동으로 이 사회를 변혁시켜 사람이 사람답게 대접받고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이라 여겼습니다. 그렇기에 제 청춘을 다 쏟아 부어도 전혀 아깝지 않았습니다.
◉ 학생운동, 1996년 8․15 범민족대회
학생운동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고등학교 때 우연히 보게 된 5.18 광주민중항쟁 동영상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 받은 충격과 분노는 저의 대학생활을 자연스럽게 학생운동의 길로 접어들게 했습니다. 학생운동을 하면서 일 년에 수 십 번이 넘는 각종 출범식과 발대식 그리고 집회현장에 참가했습니다. 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어떤 때는 한 밤 중에 불빛 하나 없는 관악산을 넘어 서울대로 들어가는 수고를 하기도 했습니다.
경찰의 원천봉쇄를 뚫고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 도로 한 복판을 수 km씩 뛰어 다니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때는 학생 본진을 지키기 위한 사수대가 되어 최루탄과 지랄탄이 자욱한 거리 한 복판에서 쇠파이프를 들고 경찰과의 전쟁 아닌 전쟁을 수도 없이 치러야만 했습니다.
그러던 1996년! 8.15 범민족대회가 연세대에서 열렸습니다. 경찰은 범민족대회를 불법집회로 규정하고 서울과 수도권의 모든 경찰 병력을 동원하여 연세대를 봉쇄하였습니다. 9일 동안 물과 음식을 차단한 뒤 연세대에 모여 있는 수 만 명의 학생들을 진압하면서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때 너무나 안타깝게도 의경 한 명이 사망했고요, 단일 사건으로는 사상 최대인 구속 462명 연행 5,800명이라는 전무후무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 현장에 함께 있었던 저도 이 때 후배 한 명과 동기 한 명이 구속(실형)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 첩보영화 같던 미행 피하기, 그러나 긴급체포
그리고 1년 뒤인 1997년 인천교육대학교 개교 이래에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인천경찰청 보안국에서는 인천교육대학교 한국 근․현대사 역사교육을 위해 결성한 ‘통일을 여는 사람’들을 이적단체로 규정하고, 1년을 넘게 내사를 벌이다 1997년 11명의 총학생회와 과학생회 임원들을 구속했습니다.
구속되기 전 한 달 전부터 경찰의 미행을 피해 학교 뒷산을 넘어 학교를 출입해야 했고, 버스를 타고 회의에 참석 할 때에도 중간에 한두 번 내려 미행이 없는지를 확인하고 갈아 탈 정도로 조심했습니다. 그리고 집에는 가지도 못하고 여관이나 자취하는 친구들의 집에서 기거해야만 했구요. 지금이야 이렇게 웃으면서 이야기 할 수 있지만 그 때에는 마치 첩보 영화의 한 장면을 찍는 것처럼 하루하루가 정말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제가 체포되는 당일에도 총학생회 회의가 있었습니다. 시간이 늦어 ‘혹시 오늘 체포될까?’ 하는 마음으로 정문을 통해 들어오다 결국은 정문에서 숨어 기다리고 있는 보안국 형사들에 의해 긴급 체포되었습니다. 제가 체포될 때 수많은 학생들이 있었고, 저를 ‘형님! 형님!’하고 따라 다녔던 후배들도 많이 있었는데 저를 도와주는 친구는 한 명도 없더라구요. 그 때 정말 속상하고 서러웠습니다. 주변에 어려운 일을 겪는 이웃을 보면 꼭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긴급 체포된 뒤 서울로 끌려가 조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얼굴을 가린 채 이동하였기에 그곳이 어떤 곳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였지만 조사를 받기 위해 방으로 들어서는 그 순간 ‘헉’ 소리밖에 안 나더라구요. 방 안은 모두 방음 시설이 되어 있었고, 침대 하나와 욕조 하나, 그리고 조사를 받기 위한 책상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곳은 바로 예전에 조직 사건이나 간첩단 사건을 취조할 때 사용하던 장소였음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 구속 수감, 그리고 배반과 실연
비명소리가 새나가지 않기 위한 방음시설, 고문과 잠을 재우지 않기 위한 욕조! 순간 정신이 하나도 없더라구요. 하지만 우려하였던 고문이나 폭행행위는 없어서 얼마나 다행이던지... 오히려 저를 연행해 온 형사들이 고맙기까지 했습니다.
인천 검찰청에서 2차 조사를 마치고 기소한 법률 위반 내용은 이적단체 결성, 국가보안법 위반,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폭력 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등 이였으며 검찰은 5년을 구형했습니다. 보통 검찰 구형 5년이면 일반적으로 1심에서 징역 3년, 항소하면 징역 1년 6월의 법정 구속이 선고되기 때문에 저를 놓고 새벽과 밤마다 금식으로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어머니께 괜히 힘든 수고 하지 마시고 몸 건강 잘 챙기시라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선고 공판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고 공판에서 모든 예상을 뒤집고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11월에 석방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라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핍박과, 조롱과, 비아냥으로 쫒아버렸던 저였지만 하나님이 저희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를 받으셔서 제가 석방된 것이 믿어졌습니다.
출소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어느 선배를 통해 인천, 부천지구 총학생회 연합 투쟁국장의 자리를 제안 받았습니다. 인부총련 투쟁국장을 맡게 되면 다시 구속되는 것을 각오해야 하고 구속을 피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수배생활을 감내해야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기에 그 때는 정말 자신이 없더라고요. 저를 바라보시던 어머니의 눈물을 외면할 수 없었고 또한 내 앞 날에 대한 염려로 인해 인부총련 투쟁국장의 제안을 거절하고 인천을 도망치듯 나와 과천에서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하게 되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정권 말기 공안사범에 대한 사면복권으로 인해 초등임용고시를 치를 수 있는 자격이 다시 회복되어 운동권 선배들이 있는 인천을 등지고 경기도로 초등임용고시를 보고 경기도 안산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제가 구속까지 되어도 끝까지 기다려주고 함께 해주며 8년을 사귀었던 여자 친구로부터 이별통보를 받았습니다. 그 순간 하늘이 다 노래지더군요. 왜냐하면 저는 당연히 발령을 받고 나면 결혼을 할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저는 키도 별로 크지 않고, 얼굴도 잘 생기지 못했으며, 모아 둔 돈도 없는 가난한 청춘이었어요. 그래서 앞이 캄캄하더군요. ‘이제 결혼은 다 했구나!’ 이런 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별의 아픔과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발령받기 전까지 6개월 동안 1톤 트럭에 물건을 싣고 장사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갈치, 오징어, 조기, 소금, 온갖 종류의 과일 등 웬만한 건 다 팔아보았던 것 같아요.
그 때 벌었던 수입이 제가 처음으로 받았던 교사 월급보다 2배 이상은 많았던 것 같습니다. 돈 버는 맛을 알아 실연의 아픔을 잊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담인데 절대로 머리와 꼬리가 잘린 갈치는 사시면 안됩니다. 대부분 수입산을 속이기 위해 머리와 꼬리를 잘라서 팔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렇게 속여 팔았거든요. 국산 갈치는요, 아무리 커도 눈이 작고 꼬리가 가늘게 아주 길게 늘어져 있습니다. 꼭 좋은 갈치 고르시기 바랍니다.
◉ 인생의 대 반전, 해결되지 않는 고민
그런데 이 구속과 배반과 실연의 상처가 내 인생의 대박을 터뜨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경기도 안산으로 발령받은 학교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되었거든요. 처음 본 아내 첫 인상은 마치 새벽이슬같이 참 맑고 순수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아내에게 보낸 편지글 첫 머리가 ‘어린왕자의 눈을 닮은 재영이에게!’였습니다. 그때는 그랬습니다. 이렇게 만난 아내를 통해 춘천 한마음 교회를 가게 되었고 저는 그곳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지 않았다면 저는 절대로 인천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고, 인천을 떠나지 않았다면 저는 여전히 사회변혁운동의 길을 떠나지 않을 인물이었기에 하나님은 구속이라는 방주 속으로 저를 끌고 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인도하심이었습니다.
하지만 춘천 한마음교회로 향하는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도 않으면서 예배당에 앉아있는 것 자체가 힘들었거든요. 더군다나 제가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이 여자가 결코 결혼해 주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속이 타들어 갔습니다. 마음이 급한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예수님을 믿어 결혼을 하든지 아니면 결혼은 포기하든지 둘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간절히 찾기 시작한 하나님이었습니다. 제 머리로는 절대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가 믿어지지 않지만 내 인생에 있어 몇 달이라도 하나님과 성경에 대해 연구해보고 알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하여 그 때부터 성경을 읽고 교회 형제들과 교제를 하며, 작은 교회 예배와 춘천 한마음교회에 빠짐없이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절대 이 고민은 해결되지 않더라고요.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수 있고, 보이지 않는 천국과 지옥을 믿을 수 있지?’ 와 정말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믿고 싶은데 도대체 믿어지지가 않는 거예요. 그래서 믿지도 않는 제가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까지 하였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지금 내 앞에 환상으로 나타내 보이시던지, 아니면 신비한 체험을 하게 해 달라고 부르짖어도 보았지만 그런 일들을 결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 하나님의 승부수, 회개와 굴복
그러던 중 춘천 한마음교회의 한 형제와 교제를 하며 신선한 충격이 나의 머리를 강타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실제로 이 땅 가운데 사람의 형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다 가셨다는 거예요.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충격이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이라고? 2,000년 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은 인간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내 머리는 혼돈 그 자체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내 머리 속에서 이어진 질문 하나!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지?’ 이런 저의 생각을 어떻게 알았는지 그 형제가 찾아 읽게 한 성경 말씀은 내 모든 생각과 가치관을 완전히 굴복시키고 말았습니다.
마태복음 12장 39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그리고 사도행전 17장 21절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하셨더라구요. 성경에 예언되어 있는 대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는 부활의 표적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주인이라는 너무나 확실한 증거, 믿을 만한 증거를 모든 사람에게 주셨더라구요. 예수님의 부활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며, 나의 주인이심이 확증되어지는 순간 저의 모든 가치관과 생각이 한 순간에 무너져 버렸습니다. 제가 옳다고 생각해 왔던 모든 이념과 사상이 모두 헛것이었음이, 속고 살아왔음이 정말 한 눈에 보였습니다. 와! 정말 막혔던 가슴이 탁 열리더군요. 정말 살 것 같았습니다.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었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확증, 천국과 지옥의 확증, 소설 같았던 성경 66권이 진리라는 확증,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라는 확증은 부활이었습니다. 은사, 신비한 체험, 기도 응답 등이 하나님의 승부수가 아니라 부활이 바로 하나님의 승부수였습니다.
부활로 예수님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것이 확증되니 그때서야 비로소 죄가 무엇인지 보였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믿을 만한 증거를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수님을 믿지 않고 내가 주인되어 내 멋대로, 내 원대로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책망하시는 죄였습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책망하시는 근원적인 죄는 바로 요한복음 16장 9절의 예수님을 주인으로 믿지 않은 죄라는 것이 비춰지는 순간 하나님 앞에 눈물로 회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없다며 전능자를 부정하고 무시하고 멸시하였던 수많은 시간들! 나를 살리기 위해 찾아왔던 수많은 예수님의 발걸음을 비웃음과 조롱과 모욕으로 쫒아버렸던 수많은 시간들! 내 인생의 주인은 나라고 외치고 다니며 행했던 수많은 죄악들! 그저 예수님 앞에 ‘이 죄인 용서해 주세요.’라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2,000년 전 도마의 고백을 제 마음 중심에서 드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니 사람들을 바라보는 저의 눈이 완전히 달라져 버렸습니다. 제가 가르치는 반 아이들, 제가 만나는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이제는 복음으로 살려야 하는, 저에게 맡겨주신 너무나 귀한 영혼들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3월 학부모 총회 때마다 학부모님들 앞에서 예수님을 믿는 저의 신앙을 분명히 말씀드리며 항상 이렇게 약속을 드립니다.
‘저에게 맡겨주신 이 귀한 영혼들의 주인이 바로 예수님이시며 이 아이들을 대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 대하는 것임을 알기에 1년 동안 이 아이들을 정말 예수님 대하듯 사랑으로 섬기는 교사가 되겠습니다. 제가 주인 되어 이 아이들을 절대로 함부로 대하지 않겠습니다.’ 라구요.
저는 돈을 벌기 위해서 학교에 다니는 교사, 세상의 지식만을 전해주는 교사가 결코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복음으로 죽어있는 영혼을 살리는 교사,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아이들을 사랑할 수 있는 교사가 되게 해달라고 매일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며 학교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쁨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저의 대학 동기가 사람들을 만날 때면 종종 저의 이야기를 한다고 합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윤창배가 변한 것을 보면 분명 하나님은 계신다.”구요. 저의 삶을 이토록 놀랍게 변화시킨 것은 다름 아닌 ‘부활하신 예수님은 나의 주인’이라는 너무나 확실한 복음의 능력이었습니다. 이 복음으로 저의 생명을 살리시고 저의 삶을 변화시켜 주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부족한 저의 간증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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