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마음 간증시리즈 ] 선우정 자매의 자녀 '열정양육' 수기
▲ 선우정 자매 ⓒ한마음교회
선우정 자매 / 춘천한마음교회
자식의 외국어 공부가 우상이 되어 부모님께 받은 재산 40억 원을 북경에서 다 쓰고 죽음의 벼랑 끝에 섰다가 오직 빛이신 예수님만을 바라 볼 수 있게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소위 말하는 SKY대학을 나온 사람도, 돈이 많다고 하는 사람들도 전혀 부럽지가 않았는데요. 외국어를 2개국어를 한다, 3개국어를 한다 하면 그것이 부러웠고, 누구네 언니가 일본 살잖아, 누구네 딸이 미국 살잖아, 하면 막연하게 너무나 부러웠어요.
머리가 크고 난 후부터 외국에서의 삶과 외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사람들은 저의 동경의 대상이 되었는데요. 그래서 인지 대학부터 결혼 하고 나서도 상당히 오랜 시간,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영어학원이나 일본어학원의 문을 두드리곤 했습니다.
결혼 후 아이 둘을 낳았고, 그중 첫째는 딸, 둘째는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은 3대 독자였는데요, 시댁에서는 고생했다며 선물로 외제차를 사주실 정도로 생활이 부유했어요.
저의 딸아이가 4살쯤 되었을 때부터는 모든 것을 딸에게 쏟아 붇기 시작했어요. 하루 종일 영어와 일본어 테이프를 틀어주었고, 아이의 적성을 찾겠다며 영어 유치원, 일본어, 각 과목 학습지, 미술, 피아노, 바이올린, 그리고 운동은 다른 아이들의 몇 배의 수업료를 내며 개인레슨으로 골프, 빙상, 겨울에는 스노우보드를 가르쳤구요. 성악과 창에 이르기까지 한 달에 몇 백만 원씩을 써가며 초등학교도 입학 전인 아이를 하루 종일 이 학원, 저 학원으로 데리고 다녔습니다.
중국어 3년 배우고 캐나다로 가면 영어와 프랑스어까지
그즈음 지인 몇몇 가족이 영어 조기교육을 위해 2, 3년 정도씩 캐나다에 나가는 것을 보고 너무나 부러워했는데요. 방학이면 캐나다로 가셨던 지인들이 한국에 들어와 들려주는 그곳 생활과 유창해져만 가는 아이들의 영어 실력, 특히나 제 2외국어로 프랑스어를 배우고 있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습니다.
그때 마침 남편이 사업차 자주 출장 다니던 북경으로 가자는 제안을 했는데요. 영어권이 아니라 좀 실망스럽긴 했지만 중국에서 한 3년 중국어 배우고, 캐나다로 가면 되지 뭐. 그러면 우리 아이들은 4개국어는 능히 할 수 있게 될거야, 이런 생각으로 2003년 2월 북경행 비행기에 올라탔습니다.
그 당시 북경에서의 생활은 제가 그동안 꿈꿔왔던 여유롭고, 자유로운 외국생활과는 많이 달랐지만, 외국어를 잘 하게 될 거라는 기대감으로 살았어요. 중국학교에 다니게 된 아이의 입에서 중국어가 나오고 중국어 동화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너무나 기뻤는데요. 그런 아이들을 보며 저의 욕심은 점점 켜져 갔습니다.
두 아이를 새벽형 인간으로 만들겠다며, 새벽 4시면 아이들을 깨워서 중국어 과외를 했어요. 북경은 아파트 방음이 안돼서 옆방에서도 잘 들렸기 때문에, 과외할 때 똑같은 교재 한권을 더 준비해서 아이들이 혹시 공부하다 딴 짓을 할까봐 수업시간 내내 옆방에서 체크하며 들었어요. 과외가 끝난 다음에는 과목별로 문제집을 한 장씩 풀게 한 다음에 학교에 보냈고, 친구도 중국친구들 하고만 놀게 하고, TV도 중국만화나 중국프로그램만 시청하게 했습니다.
한번은 아이들과 미용실에 갔는데, 작은 아이 머리를 손질하던 미용사가 놀란 눈으로 여기 와서 좀 보라는 거예요. 작은 아이 머릿속을 들춰 보여주시는데, 왼쪽 귀 뒤쪽으로 오백 원짜리 동전보다 조금 큰 구멍이 나 있는 거예요. 미용사는 원형 탈모냐고 물어봤는데, 저는 “아니예요. 아이가 뜯어서 그래요.” 하고는 그냥 넘겨 버렸습니다.
그 당시 두 아이들은 하기 싫은 공부를 하면서도 엄마가 무서워서 말도 못하고, 작은 아이는 머리카락을 하나씩 뜯거나 눈썹을 뜯었는데요. 나중에는 눈썹이 없어서 앞머리를 길러서 가리고 다녔어요. 큰 아이는 왼쪽 옆머리를 계속 끊어서 항상 왼쪽과 오른쪽 옆머리 길이가 달랐어요. 이런 아이들의 스트레스는 무시하고 오히려 저는 “너희가 앉은 자리는 항상 머리카락 투성이야! 미치지 않고서야 멀쩡한 머리카락을 왜 잡아 뜯어!” 하면서 소리 질러 혼내곤 했습니다.
그때 생각으로는 3년만 중국에 있을 예정이었기 때문에 열심히 중국어 공부에 투자를 했습니다. 남편은 사업차 중국 여러 지역과 한국으로 출장을 다니느라 바빴기 때문에, 주말이면 두 아이를 데리고, 현지 언어는 생활에서 배워야 한다는 허울 좋은 핑계로 쇼핑을 다녔구요. 돈에 개념이 전혀 없었던 저는 가정주부로서 지나치다 할 정도의 돈을 물 쓰듯이 쓰고 다녔어요. 어린 아이들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휘감아 주었구요. 매 주말이면 호텔에 가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반복되는 남편의 사업투자와 실패, 저의 돈에 대한 무개념으로 6년여 정도 만에 가지고 있던 돈은 바닥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큰아이가 중국어를 어느 정도 하게 되니까 저는 또 욕심이 생겨 살고 있던 아파트까지 팔아서 일년에 학비를 1800-2500만 원 정도를 내며 아이를 영어를 하는 학교로 전학을 시켰어요. 학비 말고도 아파트를 팔았기 때문에 1년 렌탈비 역시 학비만큼 하는 집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미친 것 같아서 정신병원에 보내야하나 걱정
학교를 옮기고 영어로 모든 수업이 진행이 되면서 각 과목마다 과제를 체크해주시는 원어민 선생님이 필요했고, 어려운 공부를 위해 선행을 해야 했기 때문에 고액의 과외는 필수였어요. 그 당시 과외비가 학비보다 더 들었습니다.
이렇게 공부시키던 중 통장의 잔고는 사라져 버렸고, 어떻게 해서든지 영어를 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친정에서까지 돈을 끌어다 쓰게 되었어요.
그러나 북경의 높은 집세와 생활비, 학비는 날이 갈수록 올랐고, 저의 대책 없는 아이들의 공부에 대한 투자와, 남편의 사업 실패, 급기야는 강화된 외국인의 대한 비자문제까지 겹쳐서, 경제적 압박으로 북경에서의 생활을 지속할 수가 없었어요. 결국 9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어요.
정말 돌아오기 싫었어요. 성공해서 오는 것도 아니고, 쫄딱 망한 꼴로 한국에 돌아오려니까 죽고 싶은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런데 막상 죽으려고 마음먹으니까 아이 둘과 저, 이렇게 셋 다 죽으면 괜찮을 텐데 혹시라도 이중 한사람이라도 자살이 실패로 돌아가 살아 있게 되면, 사는 동안 그 상처를 어떻게 감당할까 라는 생각에 죽는 것 조차 두려웠어요.
그 후 한국에 돌아온 저는 지금까지 공부한 중국어와 영어 실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지금의 형편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상황이 너무나 불안했어요. 그리고 오랫동안 한국에서 공부를 하지 못했던 아이들은 자신감도 사라지고 걱정과 두려움 뿐 이었습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전학 전에 미리 공부에 적응시키겠다며 말이 좋아 공부지 자는 시간 빼고는 소리 지르는 일로 하루를 보낸 듯싶어요. 지금에야 말이지만 그런 저를 지켜보셨던 친정엄마께서 미친것이 아닌가 싶어 저를 정신병원에 보내야하나 라는 생각을 하셨다고 합니다.
소리소리 지르며 염려로 가득 찬 저는 두통약을 달고 살았고, 두통이 너무 심한 나머지 머리를 내 주먹으로 두드려 가며 생활을 했습니다. 그래도 좋아지지 않아 신경과에 가서 검사도 하고 뇌 CT도 찍었는데요. 다행히 어떤 특별한 병명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경계성 고혈압과 목에서 뇌쪽으로 올라가는 혈관이 좀 불안 하시다며 혈압을 좀 떨구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약을 복용할 때는 좀 괜찮았지만, 분내고 소리치고 악쓰고를 반복하는 저의 생활 때문인지 두통은 여전했습니다.
점집 다니는 친정어머니, 매월 불공드리는 시어머니
3월이 되어 아이들은 한국에서의 학교생활이 시작되었고, 그토록 순종적이고 엄마 말이라면 법으로 알던 딸아이가 한국에서의 고등학교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변해 버린 것이었어요. 전처럼 대하는 저에게 맞서 싸우기 시작했고, 자기도 한국에서의 학교 공부가 너무 힘들고, 어렵고, 괴롭다며 울며 대들곤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북경에서 다니던 학교는 공부의 양이 많긴 했어도 방과 후 다양한 클럽활동과 외국인들이 많은 학교였기 때문에 화장과 악세사리 하는 것도 자유로웠고, 금요일이면 교복이 아닌 자유복과 함께 파티나 여러 가지 행사로 또 다른 즐거움이 있었거든요. 이렇듯 한국학교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학교공부 뿐만 아니라 한국의 고등학교 학생들과의 생활을 익히는 것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것 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요, 초등 6학년이었던 작은아이도 한국에서의 학교생활을 시작한 후에 자기도 모르게 작은 일에도 화가 났고,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이렇듯 딸아이가 저에게 대드는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자 저는 아이들에게 매도 들었고 맞지 않으려는 딸아이와 몸싸움 까지 하게 되었어요. 그때 저를 노려보던 딸아이의 눈빛이 섬뜩하고 무섭기 까지 했습니다.
이런 저희 모녀를 지켜보시던 친정엄마께서 하루는 “누구네 집 딸이 그렇게 엄마랑 싸우고 문제아였는데 교회를 나가면서 달라졌다더라. 너네도 교회를 한번 나가보는 게 어때?” 라고 하셨어요. 사실 저희 친정엄마가 그런 말씀을 하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요. 제가 아주 어릴 적부터 엄마는 집안의 모든 대소사를 점집에 찾아가 물어보셨고, 굿하는 모습도 수차례 보고 자랐습니다. 그리고 제가 결혼한 후에는 시어머님과 함께 초하루, 보름을 꼬박꼬박 챙기며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는 가정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국에 나온 6개월간의 생활이 너무나 지옥 같았기 때문에 한 학기를 마치며 아이들의 방학이 시작되면서 막연하게 교회를 다녀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40년 넘는 동안 살면서 교회를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저로서는 어느 교회를 가야할지, 또 가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고 자신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친정엄마께 생활비를 타서 쓰는 것이 죄송스러워 취업을 해야겠다 마음먹고 구인광고 신문을 통해 접한 한 학원에 고민 끝에 이력서를 들고 가 면접을 보게 되었습니다. 면접을 보시던 분이 교회에 다니냐 물으셨고, 우리 학원은 일주일에 한 번씩 예배를 드리는데 참석 할 수 있느냐 하셨어요. 저는 그렇지 않아도 교회를 다녀볼까 했는데 잘 되었다며 그렇게 하겠노라 대답했고, 며칠 후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고 한국에서의 직장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 학원의 실장님의 권유로 교회에 가보기로 약속을 하게 되었습니다.
기다려지는 일요일, 아이들과의 사이도 점차 회복
이 사실을 두 아이에게도 알렸고 꼭 같이 교회에 가자했더니, 저와 사이가 썩 좋지 못했던 두 아이 모두 죽어도 교회에는 가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설득도 하고 화도 내어 우선 딱 한 번 만 가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저희는 2012년 9월 9일 교회라는 곳에 처음 가게 되었습니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교회 마당은 자갈밭이었고, 가을 햇살에 눈부시도록 반짝거리는 나뭇잎과 웃으며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는 그곳 사람들은 마치 다른 세상 사람들 같았어요. 더욱 놀라웠던 것은 예배당을 가득 메우고 있는 사람들이었는데요. 앉을 자리도 부족해서 복도 사이와 좌석 맨 뒤 좁은 공간까지 간이 의자를 놓고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도대체 어디서 이 많은 사람들을 모아다 놓았는지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그날 특별이벤트가 있었는데요. 목사님의 출타로 주례를 서지 못하게 된 커플의 결혼식이 갑작스럽게 즉흥적으로 거행 되었고, 마치 영화에서나 보는 모습 같았어요. 모든 것들이 신기하고 신기했어요. 그리고 저희 작은 아이는 그곳에서 당시의 학교 담임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는데요. 한국에 온 후 처음 만나게 된 담임선생님이셨는데, 한국생활에 서툰 아이를 잘 보살펴 주셔서 저역시도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런 담임선생님께서 다니시는 교회라고 하니까 더욱 신뢰가 갔습니다.
교회에 가지 않겠다던 작은 아이는 교회에서 학교 담임선생님을 만난 후 마음이 확 열려 바로 그 다음 주일부터 아침에 일어나 혼자 교회 버스를 타고 주일학교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구요. 딸아이도 한 달 만에 중고등부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 말씀도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왠지 모를 평강이 임했고, 매일 매일이 기뻤구요, 아이들과 함께 교회에 가는 일요일이 기다려졌습니다. 보기만 해도 서로 잡아먹을 듯하던 아이들과의 사이도 점차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백배를 받기 위해 마련한 통로 ‘복권 한 장’
기독교에 무지했던 저희는 처음 본 성경책을 한번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폈는데, 도저히 어디서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몰라서 서점으로 가서 쉽게 읽을 수 있는 만화 성경의 신약부분을 샀어요.
집에 돌아와서 서로 먼저 읽고 싶다 해서 가위, 바위, 보로 순서를 정했고, 한국에 온 후 이때만큼 저희 셋이 기쁘고 의견이 일치하기는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이기게 된 딸아이는 책을 펼치자마자 “엄마, 마태가 뭐에요?” 하고 묻는거예요. 저는 “글쎄… 뭐지?” 그때 작은 아이가 옆에서 “교회 선생님이 사람이름이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그래서 저는 “에이 설마… 사람 이름이 마태일라구.”라고 할 정도로 무지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 후 만화 성경을 읽으며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분인 것을 알게 되었고 밤을 새며 셋이 순서를 정하여 읽었습니다.
만화 성경을 접한 후 성경책을 펴자 세상의 좋은 말씀은 성경책 안에 다 있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초신자였고, 세상 속에서 너무 오래 살았던 저는 성경의 말씀을 세상적으로 해석하게 되었다는 거였어요.
일예로 마가복음 10장 29-30절 말씀 중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게 된다는 말씀을 보면서 할렐루야를 외쳤어요. “백배! 백배! 집과 전토를 백배나 주신다고? 그럼 십일조를 더 드려야하나?” 교회는 출석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아이들의 외국어가 우상이었던 저는, ‘우와, 백배를 받으면 아이들을 다시 중국어 학원과 영어학원에 마음껏 보낼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말씀을 보자마자 저는 ‘저의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라고 고백하고는 저에게 백배를 주십사 정말 열심히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도록 백배의 축복이 없는 거예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저에게는 하나님께서 백배의 축복을 주실 만한 통로가 없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나름 배려의 차원에서 주님께 통로를 드려야겠다는 생각으로 복권을 한 장 샀습니다.
그리고는 일주일간 그 복권을 놓고 정말 열심히 기도를 드렸어요. 일주일 후에 가슴 조리며 확인해 본 결과 복권은 꽝이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저는 정말 아둔한 속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성령님의 인도함으로 이미 저는 백배의 축복인 교회 공동체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셨고, 복음으로 하나 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천국의 삶을 살고 있음에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출근을 하는데 걸어가는 도중 갑자기 눈앞에 십자가가 보이며 나의 죄 때문에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이 그대로 부어져 길에서 혼자 눈물을 흘리며 걸었던 감격적인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슴이 얼마나 벅차고 기뻤는지 몰라요. 그러나 신앙생활을 시작한 후 들어온 마음의 평강이 이상하게도 생활의 염려라도 들어오면 누가 뭐라 하지 않았는데도 ‘나 이번 주일에 교회에 안가’라는 생각이 들어오는 것이었어요. 그럴 때 마다 두 아이들이 그러면 안 된다고 교회는 꼬옥 가야 한다며 성경책과 가방을 들고 저를 끌고 교회로 가곤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진심으로 사과, 더 이상 눈썹 뜯지 않아
이런 생각이 들어온 제 자신이 실망스러워 이런 생각이 들어오지 않게 해 주십사 기도를 드리는데 하나님께서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는 말씀을 주셨어요. 그 후 흔들릴 때 마다 주신 말씀을 묵상하며 이겨낼 수 있었는데요. 그런데 아이들을 통해 들어오는 환경적 문제와 사람에 대한 원망과 낙심이 끝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었어요. 교회를 다닌지 얼마 안 되었어도, 십일조도 드리고, 새벽기도, 수요예배, 작은예배, 토요찬양예배, 주일 1, 2부 예배, 간증기록까지 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저에게 이러실 수 있냐며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기 까지 하였습니다. 여전히 자식이 우상이었기 때문에 자식을 통해 들어오는 연단은 한 순간에 저를 무너뜨렸습니다.
그러던 중 새벽예배시간에 목사님께서 전능자가 이 땅에 오셨다 가심으로 믿을 만한 증거인 부활을 주셨는데, 아직도 자식이 우상이고, 돈이 우상이고, 자기가 주인 되어 살고 있는 독사의 새끼가 있다고 말씀 하시는데, 가슴이 쿵하며 손이 떨리고 머리가 아찔해 짐을 느꼈습니다.
교회를 출석하며 몇 개월 동안 들어왔고, 역사적 사실임에 놀라 흥분했던 부활이었는데, 여전히 자식이 우상이었던 저에게는 지식이였다는 것을 알게 해주셨어요. 그리고는 이 ‘부활’ 두 글자가 머릿속에 새로이 박히면서 ‘아! 부활! 이분이 진짜 부활 하셨구나. 그런데 내가 여전히 주인 되어 부활 하신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었구나. 아! 그럼 어떡하지?’ 부활과 함께 저의 죄가 너무나 선명해 지면서, 쏟아지는 눈물로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악랄한 죄를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2장 22절의 말씀인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라는 말씀이 하나로 연결되어 지면서 성경의 모든 말씀에 그대로 아멘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식과 자식의 외국어 공부가 우상이었던 저는 마음 중심에서 이 아이들이 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자녀임을 고백하게 되었어요. 고백과 함께 이 아이들이 얼마나 귀한 주님의 자녀인지 마음을 부어주셨습니다. 제가 저의 욕심으로 함부로 소리 지르고, 윽박지르고 할 수 있는 저만의 소유물이 아니었어요. 고백 후 아이들에게도 진심으로 사과를 했고, 지금은 딸아이가 학교에서 동아리 기장도 맡아 토론대회에서 상도 받으며 적극적으로 학교생활을 하고 있어요.
아이가 야자 후 집에 와 늦게 까지 공부하면 그만하고 자라고, 공부는 학교에서만 하면 된다고 말하고 있고, 저를 보는 딸아이의 눈빛도 달라져 너무나 사랑스럽습니다. 작은아이는 이제는 더 이상 머리카락과 눈썹을 뜯지 않구요. 학교 가는 것이 즐겁고, 수업도 재미있다면서 동아리활동과 봉사활동도 빠지지 않고 신나서 하고 있습니다.
그 후 예배 중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이 말씀으로 제가 하늘에서 파송 받은 자이며,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알려주셨어요. 이 땅에서의 저의 신분을 찾은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하늘에서 파송 받은 자로 사명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사역지인 학원에서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저의 우상이었던 두 아이들은 동역자로 함께 교제하며, 함께 전도에 대한 고민도 하며, 교회 공동체 안에서 행복한 천국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 어둠에서 내가 주인 되어 산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마귀가 넣어주는 생각대로 그대로 살면서 나 아닌 내 주변의 다른 이들도 상당히 힘들게 했다는 것을 이제는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제가 입술을 열어 예수님을 전하는 자로 변화 되었고, 아이들은 기쁨으로 중고등부 찬양팀을 섬기며, 예수님을 마음의 주인으로 믿는 지금의 생활이 행복하다고 고백합니다.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외국어가 아닌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선우정 자매 hmu1219@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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