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일에도 심하게 걱정하던 나는 모든 일에 영향을 받았다. 시험기간에는 온통 걱정으로 일상생활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늘 걱정이 많다보니 자주 체하고 살도 쭉쭉 빠졌는데 고등학생때 증세가 더욱 심각해졌다. 수업시간에 항상 챙겨오던 물병이 보이지 않으면 불안감으로 수업에 집중할 수 없었고, 쉬는 시간에 화장실을 다녀오지 않으면 공부를 전혀 할 수 없었다. 수능을 앞두고 이런 증상이 절정에 이르렀다.
상태가 심각했지만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어느 날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까지 걱정하는 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정신병원에 갈 것 같은 위기감을 느끼기도 했다. 상태의 심각성을 안 아버지 어머니는 춘천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한마음교회가 운영하는 기숙사에 들어가라고 권유했다. 그렇게 기숙사에서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지만, 역시 힘든 시간의 연속이었다.
바쁜 학기 중에 예배 후 교회 청소를 하는 것은 너무나 힘들었다. 밀린 과제를 생각하면 짜증이 났고, 그 짜증은 이내 부모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졌다. 이런 나와 달리 교회 청년들은 이 모든 걸 너무나 큰 기쁨으로 감당했다. 그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내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내가 믿는 예수님과 그들이 믿는 예수님이 뭐가 다른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느 예배 때 인도네시아에서 온 청년의 간증을 들었다. 간증을 들은 후 고민은 더 깊어졌고, 그 때 내가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인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아무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낮고 간절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렸다.
예배때 동영상 한 편을 봤다. 예수님이 성자 하나님이시라는 말씀과 예수님을 성자 하나님으로 믿을 수 있는 증거가 부활이라는 말씀이 새롭게 들리며 내 머리를 강타했다. 정말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던 중 베드로라는 제자가 특별히 눈에 들어왔다.
성경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와 함께 죽겠다고 했지만, 진짜 생사의 갈림길에 이르자 예수님을 부인했다. 그런데 이런 겁쟁이 베드로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담대하게 증언하는 게 아닌가. 베드로의 모습은 큰 충격이었다. 이 일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 선명히 알 수 있었고, 이분을 믿을 수 있는 증거가 부활임이 명백해졌다.
목사님께서 예배시간에 사도행전 2장36절의 회개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 회개를 할 수 없었다. 내가 예수님을 직접 죽인 것도 아니고 감옥에 갈 정도의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예수님을 죽음으로 이끈 그들과 같이 죄인 취급을 받는 것에 절대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요한복음 16장9절을 통해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이 죄임을 비춰주셨다.
나는 그 말씀 앞에 예수님을 주인으로 믿지 않고 내가 주인이 되어 인생을 걱정하며 살아온 죄를 회개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온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이 죄를 회개했다.
예전에는 내가 걱정하는 이유가 마귀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성령께선 예수를 믿지 않고 내가 주인 되었기 때문에 온갖 걱정을 하고 살고 있었음을 알게 해 주셨다. 이 땅이 전부인줄로만 알고 살던 내가 영원한 것에 눈이 떠지니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선명히 보였다. 그것은 ‘예수님을 전하는 삶’이었다.
지금은 공동체와 함께 예수님 분장을 하고 전도를 자주 나간다. 그 시간이 내겐 가장 행복하다. 걱정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의 삶을 살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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