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을 전파한다고 말하고 있다(고후 4:5).
복음의 핵심 중 하나가 ‘예수의 주 되심’이다. 예수의 주 되심은 구원의 조건(롬 10:9)이며 실제 삶이다. 누가복음 14장 25절 이하에 나오는 망대계산의 말씀과 같이,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께 넘겨드리는 것이 주 되심을 고백한 자의 삶이라고 강조했고 성도들의 삶(행위)을 통해 예수의 주 되심이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를 확인하려고 했다.
결국 주 되심을 강조할수록 온 교회가 율법에 눌려 기쁨도, 자유도 없이 힘들어지기만 했다. 각자의 삶으로 주 되심이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를 판단하니,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을 해도 삶은 부족하고, 그러니 서로가 시험에 들고 눌리는 것이다. 이런 고민 가운데 주 되심의 문제가 해결된 날, 우리 교회에는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가 기뻐 뛰는 것 같은 기쁨이 임했다. 예수의 주 되심을 가능케 하는 근원을 찾은 것이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롬 14:8,9).
예수님께서는 왜 죽으시고 부활하셨는가. 그 이유는 바로 우리의 주가 되시기 위함인 것이다. 예수의 주 되심은 우리 삶의 모습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으로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이미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주인 되신 것을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믿는 것이다(롬 10:9,10). 이미 우리의 주인 되어 주셨으므로 예수님이 우리 주인이심을 시인하는 것이다! 예수의 주 되심은 우리 삶의 결론으로 고백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이 반듯해야만, 하나님 앞에 자랑할 만한 성과가 있어야만 주 되심의 삶이 아니다. 설사 그 모든 삶이 우리가 보기에 완벽하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의 주인 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나의 주인이신 것이다.
소유 주재권구원론을 주장하는 분들에 대해 우려스러운 측면을 걱정하는 분들이 많다. 행위구원론자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문제는 예수의 주 되심 자체가 아니다. 예수의 주 되심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이 분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달라진다.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매일매일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려고 애를 쓰는 게 아니라, 매일매일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심을 인정하고, 그 분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분이 나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주인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시다’라는 말에 우리는 억압이나 박탈을 느낄 수 있지만, 사실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 되신 것은 신랑신부의 관계와 같이 주님과 우리의 관계 맺는 삶의 시작이다. 주님이 지키시고 돌보시는 천국의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주님 안에 있는 생명, 기쁨, 평강, 천국의 소망 등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영원한 것을 누리는 삶의 시작이 주 되심인 것이다. 예수의 주 되심은 이 세상에서 가장 기쁜 소식이다. 우리 모두가 주 되심의 축복을 누리는 삶을 살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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