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진 시간 내에 완벽한 상태를 목표로 삼는 사람을 완벽주의자라고 하는데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샤프연필에 샤프심을 가득 채워 놓아야만 했고, 공책에 필기할 때는 한 페이지의 처음부터 끝까지 글씨체와 글씨 크기, 색깔이 완전히 똑같아야만 했다. 언젠가 뉴욕 여행을 계획했을 때, 모든 일정을 분 단위로 짜기도 했다.
100이라는 나만의 기준이 채워지지 않으면 모든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0이든 99든 100이 아니면 내게는 모두 0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떤 일을 하다가 내가 세운 기준에 충족이 안 되면 그 일 자체에 의미를 잃고 자책하고 우울감에 빠졌다.
중학교 2학년 때 친구를 따라 교회에 처음 가 보았고 고2가 돼 또 처음으로 ‘사경회’라는 곳에 갔다. 사경회가 끝나고 나서 내 머릿속에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죄를 아예 짓지 않는 것’, ‘믿음은 죄에 대한 완벽히 승리’라는 기준의 공식이 정립됐다. 모든 것이 완벽해야만 하는 나에게 이 기준은 곧 구원의 기준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항상 내 믿음은 제자리였다.
심각한 고민이 시작됐다. 아니, 고민보다는 넋두리와 원망의 마음이었다. ‘하나님! 도대체 언제 죄를 이길 수 있게 해주실 거죠. 저 구원받으려면 아직도 멀었나요? 당신 정말 살아계신 건 맞나요.’ 마음에서는 이런 불평을 마구 쏟아내고 있었다.
군에서 제대하고 토론토로 어학연수를 갔다. 어느 날 여럿이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신앙으로 넘어갔는데 누나가 내게 질문을 했다. “치현아, 너는 예수님을 어떻게 하나님으로 믿니.” 나는 아무 답을 할 수 없었다. 그동안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 죽어주셨다는 얘기는 많이 들어 봤지만, 정작 나를 위해 죽었다는 이분 자체가 하나님인지 아닌지는 한 번도 들어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위해 죽은 위대한 사람, 그것이 예수님에 대한 내 신앙의 전부였다.
누나는 어리둥절해 하는 나에게 증거를 말해주었다. 십자가에서 죽었던 인간 예수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모든 사람이 믿을만한 유일한 증거는 성경대로 죽고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신 것, 즉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고 했다. 그때 ‘내가 여태껏 부활하셔서 지금 살아계신 이분을 무슨 취급하고 있었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부활이 실제가 됐다. 성령의 역사였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신 말씀이 내 마음에 그대로 임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죄를 회개하지 않고 믿는다는 것 자체가 정말 말이 안 되는 거였다. ‘내가 주인이 돼서 내 멋대로 구원의 기준을 세우고, 내 방식대로 믿으려고 했으니까 하나님이 나를 도와줄 수 없었겠구나!’
그랬다. 하나님의 마음은 내 생각과 전혀 달랐다. 또 그렇게 힘들고 어렵게 해 놓지 않았는데 나는 내 기준대로 하나님 행세를 하며 살았던 것이다. 이 악한 중심이 하나님을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 그 때 알게 되었다. “하나님! 죄송해요. 용서해주세요.” 나는 중심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셨다.
그 후 나는 더 이상 완벽해질 필요가 없어졌다. 샤프연필에 샤프심이 하나 남아도, 어떤 공책에 무엇으로 써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냥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시니까 그것으로 충분했다.
구원은 내 힘으로 율법을 완벽하게 이루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나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하며 매일 매일이 자유롭고 기쁘게 살고 있다. 예수님은 나의 주인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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