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싫어한 아버지 때문에 몰래 누나와 교회에 다녔다. 내가 열 살 때 어머니는 암으로 세상을 떠나셨고 행복했던 막내의 어린 시절은 사라지고 힘겨운 학창시절을 보냈다. 누나는 집을 벗어나는 것만이 유일한 바람이었던 나를 방학 때 춘천으로 데리고 와 한마음교회 기숙사에 머물게 했다. 결국 나도 춘천에 있는 대학에 진학해 한마음교회에 다녔다.
군에 입대한 나는 국내외 귀빈의 의전행사를 담당하는 의장대에 배치됐다. 구타와 가혹행위가 많은 곳이라 ‘조용히 지내다가 살아서만 제대하자’는 생각에 신앙을 뒤로 하고 음주, 흡연 등 세상과 타협하며 예수님과 관계없이 살았다. 전역 후 사법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신앙생활을 안하는 것이 찔렸지만 합격으로 영광을 돌리자며 위안을 삼았다. 그러나 신앙의 탈을 쓴 세상 삶은 지치기만 했다. 고시에 세 번 떨어지자 아버지는 예수 믿어서 그런 거라며 화를 내셨고 아버지와의 관계는 점점 멀어졌다. 결국 나는 막다른 길의 절벽 앞에 섰다.
‘살 길은 복음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교회에 다시 돌아왔다. 예배 중에 “인생 찌질하게 집 하나 사고 텃밭 일구다가 가실 겁니까? 아니면 멋지게 주와 복음을 위해 살다가실 겁니까?”라는 목사님의 호통에 결단을 했다. 그런데 정작 인생을 걸고 복음에 집중하자 당연히 믿던 말씀까지 의심으로 혼란스러웠다.
그때부터 새벽을 깨우고 말씀과 기도에 착념하며 부활장인 고린도전서 15장 말씀을 파고 들었다. 그때 사도 바울이 보였다. 어떤 논리도 설명도 없이 그냥 ‘부활하신 예수님을 내가 보았다’(고전 15:8)고 증언하는 것이다. 바울의 그 고백이 내게 실제가 됐다. ‘바울이 정말 부활을 봤구나! 그래서 예수 믿는 자를 죽이던 사울의 삶에 종지부를 찍고 세상을 배설물로 여기며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부활의 증인이 된 것이구나!’ 이것이 비춰질 때 어릴 때 본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생생히 떠올랐다. 입관하기 전에 그 모습이 너무 두려워 고개를 돌릴 때 나는 본능적으로 어머니가 다시 돌아올 수 없음을 알았다. 눈앞의 실제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와 같이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았다’는 사도 바울의 증언과 그 삶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딱 한 번이라도 직접 보여주면 믿겠다던 허망한 내 생각이 모두 날아갔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믿을 수 있도록 선택하신 방법은 바로 부활이었다.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야 성경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었다’는 말씀들이 정확해졌다. 그때 부활이라는 증거를 보여주셨는데 그 예수님을 믿지 않고 내가 주인 돼 살았던 것이 근원적인 죄임이 비춰졌다. ‘내 인생 내 거니까 저리 가세요!’ 했던 악랄한 내 모습이 보였다. 살려달라는 회개의 말밖에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렇게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새롭게 태어났다.
모든 것을 주인께 맡기고 진정한 자유함 속에 예배를 드리고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러자 1년도 안 돼 원하던 노무사 시험에 합격했다. 결혼도 하고 아버지께 용서를 구하고 관계도 완전히 회복됐다. 하나님께서는 직장에 대한 시각도 완전히 바꿔주셔서 산업재해 등으로 큰 어려움을 당한 분들을 위해 온전히 하나님께 의뢰하며 온 마음을 다해 일을 처리하게 해 주신다. 요즘 스스로 항상 점검하는 것이 있는데, ‘예수님과 동행하며 살고 있는가?’ 이다. 우리 교회 목사님과 지체들이 주님과의 동행을 말씀과 삶으로 보여주시기에 나 또한 자연스럽게 하루하루 내 안에 살아계신 주(主) 예수님께 의지하며 살아간다. 나의 여생이 오로지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삶이 되길 기도한다.
군에 입대한 나는 국내외 귀빈의 의전행사를 담당하는 의장대에 배치됐다. 구타와 가혹행위가 많은 곳이라 ‘조용히 지내다가 살아서만 제대하자’는 생각에 신앙을 뒤로 하고 음주, 흡연 등 세상과 타협하며 예수님과 관계없이 살았다. 전역 후 사법고시 공부를 시작했다. 신앙생활을 안하는 것이 찔렸지만 합격으로 영광을 돌리자며 위안을 삼았다. 그러나 신앙의 탈을 쓴 세상 삶은 지치기만 했다. 고시에 세 번 떨어지자 아버지는 예수 믿어서 그런 거라며 화를 내셨고 아버지와의 관계는 점점 멀어졌다. 결국 나는 막다른 길의 절벽 앞에 섰다.
‘살 길은 복음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교회에 다시 돌아왔다. 예배 중에 “인생 찌질하게 집 하나 사고 텃밭 일구다가 가실 겁니까? 아니면 멋지게 주와 복음을 위해 살다가실 겁니까?”라는 목사님의 호통에 결단을 했다. 그런데 정작 인생을 걸고 복음에 집중하자 당연히 믿던 말씀까지 의심으로 혼란스러웠다.
그때부터 새벽을 깨우고 말씀과 기도에 착념하며 부활장인 고린도전서 15장 말씀을 파고 들었다. 그때 사도 바울이 보였다. 어떤 논리도 설명도 없이 그냥 ‘부활하신 예수님을 내가 보았다’(고전 15:8)고 증언하는 것이다. 바울의 그 고백이 내게 실제가 됐다. ‘바울이 정말 부활을 봤구나! 그래서 예수 믿는 자를 죽이던 사울의 삶에 종지부를 찍고 세상을 배설물로 여기며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부활의 증인이 된 것이구나!’ 이것이 비춰질 때 어릴 때 본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생생히 떠올랐다. 입관하기 전에 그 모습이 너무 두려워 고개를 돌릴 때 나는 본능적으로 어머니가 다시 돌아올 수 없음을 알았다. 눈앞의 실제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와 같이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았다’는 사도 바울의 증언과 그 삶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딱 한 번이라도 직접 보여주면 믿겠다던 허망한 내 생각이 모두 날아갔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믿을 수 있도록 선택하신 방법은 바로 부활이었다.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야 성경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었다’는 말씀들이 정확해졌다. 그때 부활이라는 증거를 보여주셨는데 그 예수님을 믿지 않고 내가 주인 돼 살았던 것이 근원적인 죄임이 비춰졌다. ‘내 인생 내 거니까 저리 가세요!’ 했던 악랄한 내 모습이 보였다. 살려달라는 회개의 말밖에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렇게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새롭게 태어났다.
모든 것을 주인께 맡기고 진정한 자유함 속에 예배를 드리고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러자 1년도 안 돼 원하던 노무사 시험에 합격했다. 결혼도 하고 아버지께 용서를 구하고 관계도 완전히 회복됐다. 하나님께서는 직장에 대한 시각도 완전히 바꿔주셔서 산업재해 등으로 큰 어려움을 당한 분들을 위해 온전히 하나님께 의뢰하며 온 마음을 다해 일을 처리하게 해 주신다. 요즘 스스로 항상 점검하는 것이 있는데, ‘예수님과 동행하며 살고 있는가?’ 이다. 우리 교회 목사님과 지체들이 주님과의 동행을 말씀과 삶으로 보여주시기에 나 또한 자연스럽게 하루하루 내 안에 살아계신 주(主) 예수님께 의지하며 살아간다. 나의 여생이 오로지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삶이 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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