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긋한데다 낙천적이고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나는, 착하고 인간성 좋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하지만 세상적인 도리나 법을 어기는 경우 그가 누구든 절대 용서가 되지 않았다. 20년째 법원에서 근무하면서 포승줄에 묶여 법정에 들어가는 모습을 볼 때면 ‘또 어떤 죄를 지어 이곳에 오는 걸까?’하는 생각에 늘 마음이 착잡해진다.
나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물려받은 유산을 탕진하고 술주정으로 가족을 무척 괴롭히다가 서울로 훌쩍 떠났고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화장품 외판원 등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얼마 후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며 불행은 다시 시작되었다. 나는 가족을 괴롭히고 가장의 도리를 못하는 아버지야말로 불법을 행하는 자라고 생각하며 분노를 터뜨렸다.
나의 ‘법 정신’은 일상생활에서도 강하게 드러났다. 방향등을 제대로 켜지 않는 운전자를 보면 창문 밖으로 소리치며 흥분했고 중앙선을 침범하여 추월하면 끝까지 쫓아가서 사과를 받아내야만 직성이 풀렸다. 또 업체 직원 근무 규칙도 매우 중시했다. 다섯 오, 너그러울 관, ‘오관’인 내 이름처럼 ‘딱 다섯 번’은 봐 주었지만 그 이상은 어떤 방법으로든 제재를 가했다. 이런 성격은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로 법과 도리에 어긋나면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아내를 따라 한마음교회에 갔다. 이사야서의 ‘땅의 거민들은 메뚜기 같으니라’는 한 말씀이 천둥치듯 귓가를 울렸다. ‘그럼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메뚜기와 같다는 거잖아.’ 그렇다면 부처, 공자, 소크라테스도 메뚜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종교는 착하고 바르게 살라는 삶의 지침으로 생각했던 것이 깨지면서 유일하게 죽음에서 살아나신 예수님을 믿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한 형제님이 ‘예수님이 왜 하나님이냐? 예수님의 부활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예수 믿지 않는 죄를 회개하고 마음의 주인으로 믿어야하는데 마음속의 주인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았다. 처음 듣는 질문이었다. 그렇게 고민의 3년이 흘렀다. 우연히 교회의 부활간증 책자를 읽다가, 모세가 놋뱀을 쳐다본 즉 살더라는 민수기 21장 말씀을 보고 무릎을 탁 쳤다. ‘아, 나는 지금껏 부활을 이 세상에서 배운 지식과 가치관으로 알려 했구나.’ 놋뱀을 쳐다보기는커녕 ‘뱀에 물렸으면 독을 뽑고 치료를 받아야지, 쳐다보면 산다는 게 말이 되나’라며 말씀을 경히 여기고 예수님의 부활을 내 생각과 가치관으로 믿으려 했던 것이다. 그 때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이 성경과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다는 요한복음 2장 말씀이 선명해지며 성경 전체가 다시 보였다.
언젠가 요한복음 16장 9절의 죄에 대하여 묵상하며 기도하던 중 하나님께서 “오관아, 너는 왜 날 안 믿니”라고 하시는 것 같았다. 순간, 내 시선이 세상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옮겨졌다. 하나님을 무시한 악랄한 죄를 회개하지 않고 내가 주인 되어 살았으니 하나님 관점에서 보면 감옥에 가야 할 자는 바로 나였다. 내가 가장 싫어했던 불법을 행하는 자가 바로 나였다. 즉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 회개하고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셨다.
우리 아버지도 내가 살려야할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니 그동안의 잘못을 빌고 복음을 전한다. 직장에서도 기회 있을 때마다 복음을 전하여 어느 새 ‘작은교회’도 세웠다. 세상의 도리와 법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내게 하나님 법으로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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